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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비참하다.'라고 말을 했다.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 친구는 정말 비참함이라는 감정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참하다거나 불행하다거나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인식하는 자신의 마음이 선택하기에 달렸다.

사실 비참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 느낌을 느끼는 당사자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황을 자신이 비참하다는 단어와 가장 가깝게 표현한 것이다.

감정에는 대체로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다양한 색으로 끊임없이 변동하는데 그 다채로운 변화를 인지하고 포착하는 그 순간에 감정의 색상의 변화는 일시 정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포착한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순간 그 포착된 감정이 확대되어 그 감정의 채택 작업이 이뤄진다. 감정이 채택된 뒤에는 그 감정과 가장 유사한 감정이 끊임없이 달라붙는다. 

우리에겐 그러한 감정의 순간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인식하는 순간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그 감정은 활성화되고 당사자 본인은 비로소 그 감정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닭이 도마 위에 올라와서 깃털이 발가벗겨진 채로 몸이 토막나고 있다. 수많은 닭과 가축들이 이런 상황에 있지만 우리들은 그 상황을 사실이나 하나의 사건 정도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감정의 인식이 없는 순간에는 모든 것은 단순한 사건일 뿐이다. 좋은 일 나쁜 일, 선한 일, 악한 일 이란 것도 그 상황에 우리가 문장으로 인식한 뒤에 더욱 확정이 되는 것이다. 그 상황을 보고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을 때 그 감정에 가장 빨리 당신에게 다가오는 단어가 그 감정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그 감정은 혐오스럽다거나 불쌍하다 잔인하다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 감정들에 대한 표현은 항상 우리들의 인식의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떠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달라붙은 것뿐이다. 또는 그 상황에 기아에 시달리는 난민들에게 그 음식이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 목이 잘렸던 닭에게는 순간적인 고통과 아픔은 있지만 치욕이라는 단어가 닭의 뇌에는 없는 단어이기에 치욕스럽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감정의 색감이 있을 뿐이다. 색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죽음과 가까운 감정과 생명과 가까운 감정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감정에는 단지 두 가지 방향이 있을 뿐이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감정과 생명과 가장 가까운 감정이 있을 뿐이며 어느 쪽에 가까운가에 따라 그 감정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다. 치욕스럽다는 감정은 죽음과 가까운 단어이며 슬픔의 감정도 죽음에 가까운 감정이다. 외롭다는 감정도 화가 난다는 감정도 죽음과 가까운 감정이다. 나 자신이 죽음에 임할 수 있는 공격을 받고 있다는 감정이 들고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동의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흐름은 항상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동처럼 변동이 있는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시 균형 잡힌 위치로 당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 감정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그것을 포착하려 하는 순간 그 감정은 그 자리에 고정되기도 하며 그쪽의 방향으로 더 힘을 받는다. 아까와는 반대로 당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감정은 다소 행복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생명에 가까운 활기찬 감정으로 느껴진다. 그렇다 그런 방향의 감정이 느껴졌을 때 당신이 이 감정에 대해서 묘사를 하려고 하는 순간 그 찰나에 그 감정은 비로소 확장되며 그 방향 쪽으로 힘을 받게 된다. 이 감정은 감사한 마음이라고 느껴졌을 때 당신이 감사하다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순간 감사와 관련된 느낌과 단어들이 연상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감정이 느껴졌을 순간 당신이 무덤덤하게 인식하거나 바라보려 하지 않고 지나가게 놔두게 되면 그 감정은 다른 감정으로 바뀌면서 감정은 균형 지점에서 평상심을 갖게 된다. 때로는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연상적 단어와 연상적 사건들이 많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 지속적으로 그 감정선을 건드릴 수가 있다. 

그런데 긍정적인 생각들과 달리 부정적인 생각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강하게 남고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일까? 즐거운 감정과 행복감은 어느 순간 질리게 되고 쉽게 평정심을 찾는데 왜 부정적인 감정에서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더욱 심해지는 경우가 많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이 그러한 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어릴 때부터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좋은 감정에 오랫동안 머물고 행복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들을 보면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 만나고 어른들을 만나면서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을 당하며 혼나게 되어 부정적인 것을 더욱 각인시키게 된다. 잘한 점에 대한 칭찬이 인색한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빨리 찾아내게 된다. 일상에서 공기와 마실 물이 있다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두 번 이상 감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잘 못 한 것에 대해서는 두 번 세 번 중복해서 혼나고 후회하도록 죄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도록 배워왔다. 반면 잘한 것에 대한 반성과 상대되는 행동에 대한 단어가 마땅하게 떠오른 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 반증이다. 우리는 잘 못한 것을 지적당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잘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칭찬받고 감사하는 것에 대한 행동보다 더 크게 작용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부정적인 상황을 상대적으로 더 조심하며, 학교와 사회에서 반성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독려하고 어느 정도 조성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문화로 배워오면서 우린 계속 잘 못한 일을 곱씹고 그런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 패턴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정신을 다치게 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가 만약 유치원에서 받아쓰기에서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아 시무룩해 있는 자녀에게 뭐라고 해주는가? 딸아이에게 넌 점수가 왜 이것밖에 안 나왔냐며 다그칠 수도 있지만 그런 딸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격려해주지 않는가? 우리는 사회에서 자녀에게 대하듯 따뜻한 위로가 어른이 되면서 줄어들게 되고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광고에서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화려하게 묘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게 매스컴에서는 만들고 있다. 그런 광고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봐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 혹시라도 냄새난다고 수군거리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냄새 탈취제를 뿌려야 한다는 광고도 보고 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고 광고에서는 꾸준하게 어필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에 이러한 제품을 쓰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꾸준히 우리들의 뇌로 삽입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이다. 타인의 평가나 비평을 받는 다고 내 세포의 조직이나 심장이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나의 뇌와 심장과 팔과 다리 그리고 정신과 마음은 열심히 변화하고 작용하고 있으며 그 모든 세포와 신경조직의 조화 속에 있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나는 모든 내부 감정들의 흐름과 마음들이 외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으며 그것들에 내가 원한다면 좀 더 귀 기울여 줄 수도 있고 그런가 보다 하며 무시할 수 있는 소리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소리들은 실제로 내가 스스로 내는 소리보다는 우리가 라디오에서 영화에서 또는 주변 사람들이 냈던 소리들이 모이고 쌓여서 불규칙하게 툭툭 랜덤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그 목소리만 들어왔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내가 내고 있는 목소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나이고 그 목소리는 내가 내왔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던 나의 뇌가 이따금 호출하는 광고와 같은 것이다. 이건 마치 인공지능 로봇에게 그 공간에 수많은 음성 샘플을 지속적으로 일정 주기로 랜덤 하게 호출해주고 그것을 인공지능 로봇의 목소리와 똑같이 들려주는 것과 같다. 그 로봇은 분명 그 목소리가 자신이 내고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마음처럼 나오고 있다고 인지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 목소리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든 제작자가 미리 프로그래밍하여 일정한 규칙과 일정한 상황에 가장 가까운 단어와 연상되는 기존에 들어왔단 문장들을 임의로 조합하게 만들어 둔 프로그래밍일 뿐이지만 로봇은 그 목소리 자체가 자신이라고 동일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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