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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생각의 그릇 안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객체들 중에서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객체의 덩어리가 손상되거나 상실되었을 때 바로 그때 슬픔의 감정이 발현된다.
정확하게는 그 느낌과 그 존재의 상실 상황을 단어를 통해 문장으로 표현하는 순간 뇌에서는 더욱 확정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이 가슴속의 한 지점에 고정이 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 문장으로 만들어진 슬픔의 표현은 마음속에서 더 크게 울려펴지고 확장되며 다양한 부정적인 단어들이 달라붙게 되고 의식은 그 상황에 더욱 다가간 뒤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상상하며 자신과 관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와 객채들이 있다. 그 존재와 나와 관계가 지어질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절대적인 슬픔의 크기가 아니여도 자신에게 영향이 있는 존재라면 그것에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현재 사상 유래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철기시대도 아니고 세계 1,2차 대전의 헐벗은 굶주림도 식민지 지배하의 인간이하의 삶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세계 안에서 그 존재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존재가 어떤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 속에서 미리 시연하는 것으로도 큰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뇌는 그것이 비록 마음속에서 그려본 상상이라는 것임에도 현실보다 더 큰 동요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을 더 넓혀 상상해야 할 것이다. 슬픔을 주려는 마음의 사정권을 벗어나 다른 범주까지 생각의 틀을 넓힐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그 조건도 사실 전후세대에 끼니도 때우지 못할 만큼 생명의 위협속에 나날을 살아가던 시점의 존재와 비교한다면 지금의 고민은 한낱 실오라기 같은 고민일 것이다.
너무 멀지 않은 곳까지 시대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잠시만 현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이순간도 고통에 괴로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슬픔과 고통을 더 큰 고통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자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때로는 너무나 그 상황에 매달려 가깝게 서 있기 때문에 그 크기를 이성적으로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나무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 있을 때는 그 나무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더 큰 눈으로 더 넓은 아량으로 큰 범위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언제나 담대할 수 있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후배가 승진할 수도 있고,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도 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불규칙하게 불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대전제를 인정하고 나 자신의 생각의 그릇의 크기를 잠시 더 크게 키우면 더 큰 상황의 환경들이 시시각각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나면 슬픔이 통과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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