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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바로보기

오래충분 2022. 1. 1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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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슬픔은 고차원적이고 충분히 이성적일까? 아이들을 키워보면 그 슬픔이 때론 너무 유치하기에 슬픔이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미흡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작 이런 일로 그렇게 슬퍼할 일인지 아이들의 눈물을 보며 때로는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의 딸아이가 5살 무렵에 그림을 그리다가 내가 더 그림을 이쁘게 그렸다고 속상해하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한 유치원 동급생이 바보라고 놀렸다고 속상해 울었던 적도 있었다. 너무나 많은 딸아이의 슬픔이 어른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 정도의 슬픈 일은 아니라고 장난으로 치부해 넘길 수 있는 일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줘도 아직 마음속에 조그마한 세상이 그려져 있는 딸아이에게는 어른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때로 따뜻한 말로 다독거려주긴 해도 상대방의 슬픔을 이성적으로 작은 일로 이해시켜 극복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슬픔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가진 마음의 크기에서 커다란 공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나 작은 공일 수도 있다. 아직 아이에겐 어제 즐겁게 가지고 놀던 풍선 하나가 사라진 것이 세상에 더 없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슬퍼하고, 어른이 된 우리들도 지금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손실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에서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낄 수도 있지만 조금 더 큰 어른이 되어 바라볼 때는 그 또한 작은 풍선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풍선을 잃어버려서 세상 슬픈 딸에게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말로 해도 그 풍선이 상대적으로 별거 아닌 것이라는 것을 말로는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그 눈물을 흘리게 된 원인이 작은 것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생각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기 전까지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그 경계선 안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세상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무리안에서 가치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무리 안에서 비난을 받고 무시를 받는 것과 같이 밖에서도 똑같이 비난을 받거나 창피나 모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울타리 밖에서는 전혀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그런 당신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 

 

우리는 항상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에게 어떤 사람을 보이기 위해 또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집에 오면 바로 그 가면을 벗고 연극 중이던 배역에서 벗어나 편안한 차림으로 방귀를 뀌면서 편안한 자신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인 당신 자신에게 인정을 받는 것에는 소홀하다. 자신을 자신이 수차례 인정하고 칭찬하고 감탄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면 그 충만한 긍정적인 작용의 누적으로 타인의 평가는 재쳐둘 수도 있다. 타인은 나의 마음속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나의 몸 전체의 극히 일부인 발가락의 감각도 동감할 수가 없는 존재인데 그들의 인정과 평가만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이 나의 감정처럼 불규칙하듯 일관될 수 없음에도 그들의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에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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